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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늬만 뮤지엄이 아니라 재단 회의실로 모였고, 그곳은 말하자면 잔뜩 힘이 들어간 공간이었다. 거대한 태극기도[1] 하나 놓여 있는. 너무나 딱딱한 분위기. 누구도 맘 편하게 발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주성진 선생님께서 최종 PT를 위한 심사표 양식을 만들어주셨다. 총 일곱 개의 평가지표가 있었는데, 마지막 하나는 자유지표였다. 각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지표를 만들어 자유롭게 평가하는 것이다.
자유지표 목록은 다음과 같다.[2]
- 서지혜 선생님: 대상 중심의 상상력을 충분히 밀어붙여 봤는가.
- 김월식 선생님: 본인이 충분하게 흔들렸는가?
- 주성진 선생님: 준비된 기획을 잘 전달하였당! (전달력)
- 이서연 님: 참여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게 하는가? - 재밌다! 여도 괜찮음 (사고성)
- 우인영 님: 기획학교에서만 나올 수 있는 기획인가 (창의성)
- 이현진 님: 얼마나 솔직하게 기획했는가 (진실성)
- 허진희 님: 다음.. 다음.. 오호.. 그래서? 궁금해! (궁금성)
- 공병윤 님: 발표 내용이 잘 전달되는가 (설득력)
- ??? 님[3]: 계획서류, 발표의 완성도
- 최보라 님: 도전적인 기획인가 (도전성)
- 홍지영 님: 예산
- 정병묵 님: 얼마나 직관적인가 (직관성)
- 김소미 님: 나를 흔드는 기획이다 (자기확장성, 도전성)
- 이소정 님: 얼마나 진심인가? (진심성)
- 유혜림 님: 얼마나 진심인가? (진실성)[4]
- 이희주 님: 뾰족한 기획이다?
我 탐구 설명서 - 정병묵 님
병묵 님은 김월식 선생님 조에서 에이스를 맡고 있다(물론 우리는 김월식 선생님 조가 혜림 님과 병묵 님, 두 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혜림 님 미안해요!). 그런데 오늘, 병묵 님께서 월식 선생님의 뒤통수를 거하게 치셨다.
PPT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쓰인 ‘我 탐구 설명서’, 그뿐이었다. 다음 페이지는 없었다.
다들 궁금해했다. 왜 그간 공들여 써온 페이퍼를 갈아엎으셨을까? 기획안을 작성하는 일은 병묵 님께서 너무나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었다. 너무 능숙한, 그게 화근이었을지도 모른다. 병묵 님은 익숙한 공적 언어로써, 我 탐구 설명서의 사업 목적 및 기획 의도를 작성하실 수 있었다. 그런데 ‘我 탐구 설명서’ 같은 활동을 하려면, 최소한 자신의 ‘我’에 탐구해야 할 미지의 영역이 남아 있기는 해야 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탐구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덧셈, 뺄셈이 뭔지 더 이상 탐구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기획서를 쓰기 위해, 병묵 님은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문제는 그 과정이 너무 쉽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고, (병묵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머리로만 고민”하다 보니, 마음 깊은 곳의 불편함 같은 것은 인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쌓인 불만들은 발표 전날, 병묵 님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병묵 님이 기획 전체를 갈아엎으신 건 아니었다. 사실 구체적인 사업계획 자체는 특별한 변화가 없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병묵 님은 발표를 거부하신 게 아니라, 직접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오셨으니까. 병묵 님께 좀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 모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병묵 님은 자신을 알아보는 기획을 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我를 탐구하기 위해, 병묵 님은 지금껏 해보지 않았던 불편함들을 스스로에게 가해 볼 것이라고 하셨다. 물을 천천히 마시거나, 식사를 여유 있게 하는 등 아주 사소한 것들부터 실천해 보면서.
실행 사안에 큰 변화가 없었다면[6], 그냥 세부 계획에 대해서만 발표해도 됐을 일이긴 하다. 예산을 편성하기 위한 발표 자리니까. 우리야 병묵 님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지만 재단 관계자들은 병묵 님의 심경 변화에 대해 우리만큼 궁금해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월식 선생님께서는 좀 안타까운 눈치로, ‘안다’와 ‘모른다’로만 나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문제인 것이지 사실 기획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는데 꼭 이런 발표를 해야 했느냐고 말씀하셨다.
나는 월식 선생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한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런 식으로 딱딱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병묵 님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나 또한 기획서를 수정하지 않고 발표할 수는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뭘 몰라? 나는 내가 누군지 잘 알아!’라고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기획안을 다 찢어버리고 발표를 거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그래, 나는 나를 잘 모르는 것 같아’라고 인정했다면,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발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묵 님은 그런 결론에 다다를 만큼 스스로의 불편함을 관찰해보지 못했다. 그것이 병묵 님의 속도였다[7].
거부도 순응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병묵 님은 솔직해지기로 결단하셨다. 솔직해지는 것은 대단히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게 아무리 객기일지라도.
나는 분명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나를 설명하려 하면 입이 막히는 이 불편함을 외면하면, 언젠가는 더 큰 허무가 찾아올 것 같았다. 그래서 머리로만 고민하지 말고, 몸으로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가?”
‘我 탐구 설명서’ 사업 계획서의 첫 장에 쓰인 병묵 님의 문장이다. 병묵 님의 기획안은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서지혜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잠재성은 많이 보이지만, 기획서로서의 완결성은 떨어진다. 기획은 그냥 아이디어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월식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병묵 님의 용기는 어쩌면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미술대학 졸업 전시 심사에 가면 이러한 태도를 보여주는 학생들이 많다. 용기 있는 태도인 건 사실이지만, 이 바닥에서는 너무 흔한 용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멘토 선생님들의 말씀에 동의하는 입장이지만, 한편으로는 병묵 님의 인생에 나타난 이 한 문장이 어떤 의미가 될지 궁금해졌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병묵 님의 이번 발표가 좋았다. 다만, 기획에 예산이 많이 필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김월식 선생님의 7번 자유지표는 이 과정 속에서 충분히 흔들렸는지를 기준으로 한다고 들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만큼은 높은 평가를 주시지 않았을까 기대해 본다.
어중간 – 이희주 님
희주 님은 오늘도 바쁘셨다[8]. 듣자 하니 일 때문에 밤을 꼬박 새고 오셨다고 한다. 택시도 안 잡히는 상황에서 부랴부랴 버스를 타고 뒤늦게 오신 희주 님께서는 뒷일 때문에 발표만 하고 일찍 가셨다. 그런데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발표를 정말 프로패셔널하게 잘하셨다. 희주 님의 에너지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리고 저렇게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을 고갈되기 직전까지 몰고 가는 이 사회는 과연 정상적인가?
‘어중간’이라는 타이틀의 기획이지만, 정작 기획자인 희주 님 본인은 극단적인 인간이라고 한다. 여기 와서 난생 처음으로 어중간해지는 경험을 하셨다고 하셨다. (어찌 보면, 어중간함은 특이함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다. 희주 님의 PPT에 “어중간하게 깨진 것만 같은” 도트 폰트가 사용되었는데, 이 어중간한 폰트를 쓴 것만으로도 PPT가 매우 눈에 띄었으니 말이다)
다음으로, 희주 님은 ‘어중간’이라는 정서가 어떻게 한국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지 설명해 주셨다. 희주 님에 의하면, ‘어중간’이라는 말 자체는 번역하기도 어려운, 한국어만의 특이한 표현이며[10], 회피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닌,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태도를 반영한다. 그리고 한국인만이 이 어중간함을 지키려고 한다. ‘뭐든지 중간만 하면 돼’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이다. 이는 한국 사회가 개개인에게 확실한 선택과 무난한 정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확신은 부담스럽고, 중간에 머무르는 것은 안정을 준다. 하지만 어중간함을 지킴으로써, 고유한 정체성의 획득은 언제나 좌절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희주 님은 프로젝트 전시(아카이빙을 겸하는)를 기획하셨다. ‘어중간’의 표현 방식을 말로써 실험해 보고, 그 결과물을 ‘어중간’한 공간에 전시하는 것이 이 기획의 핵심이다. 또, ‘빼빼로 데이 다다음날’처럼 굉장히 어중간한 날을 기념일로 지정하는 프로젝트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이셨다.
서지혜 선생님께서는 희주 님께 매우 작가적인 기질이 있는 것 같다며, 랜덤한 대중을 상대로 흥미를 끌게 만드는 재능이 뛰어나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희주 님의 기획이 참여자를 능동적으로 만들지는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하셨다. 또, 희주 님의 문제의식이 좀 더 분명해졌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덧붙이셨다. ‘어중간’이라는 단어의 유희에서 끝나지 않고, 좀 더 첨예한 문제의식을 드러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었다.
주성진 선생님께서는 이 기획의 청사진(end-picture)을 좀 더 그려보라고 조언해 주셨다. 덧붙여, 희주 님의 담당 멘토이신 주성진 선생님은 사실 PPT에 좋은 내용이 많은데, 다 설명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다며 아쉬움을 표현하셨다.
나는 이 기획의 문제의식에 상당 부분 동감했으며, ‘어중간’에 대한 희주 님의 분석이 신선하면서도 놀라운 인사이트를 준다고 느꼈다. 그런데 ‘전시’라는 형식이 희주 님의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을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전시회장에 가면 생각보다 줄글을 안 읽는 사람들이 많다. 다 읽기에는 글이 너무 많기도 하고. 만약 희주 님의 ‘어중간’ 분석이 전시장에 서문 같은 글로 적혀있다면, 그것을 놓치는 관객들도 분명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런 멋진 이야기들이 기획 참여자에게 다 전달되지 못한다면 많이 아쉬울 것 같다는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우리 집에 왜 왔니? (OO이가 보내는 편지) - 공병윤 님, 이현진 님, 허진희 님[11]
인디밴드 공연 기획 팀이다. 이 팀의 공연은 아티스트가 관객들에게 자기 집으로 ‘초대장’을 보내는 컨셉으로 기획되었다(그래서 타이틀이 ‘우리 집에 왜 왔니?’인 것이다).
먼저, 현진 님께서 인디밴드를 좋아하는 광주 시민의 삶이 얼마나 불편한지 설명해 주셨다. 요약하자면 그들은 공연 2시간을 위해서 하루에 6시간을 낭비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현진 님은 서울 중심의 공연 문화뿐만 아니라, 공연장의 문제점도 지적해 주셨다. 대부분의 공연장에 팬들을 위한 대기 공간이 없어, 많은 인디밴드 마니아들이 불편함을 겪는다고 한다. 티켓값이 싼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디밴드 공연을 보러가는 이유는 삶을 살아갈 힘을 주기 때문이라고 현진 님은 설명하셨다. 현진 님은 가장 좋아하는 밴드인 ‘해서웨이(hathaw9y)’[12]의 노랫말들을 보여주시며, 해서웨이가 주는 해서웨이만의 사랑 방식이 얼마나 현진 님을 기쁘게 하는지 알려주셨다.
다음으로 진희 님께서 기획의 진행 상황 및 세부 사항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우선, 섭외하고자 하는 아티스트인 해서웨이에게 이메일로 섭외 문의를 넣어놨으며, 대관하려는 장소인 무공간에도 신청을 넣어둔 상황이라고 한다. 또한, 인스타그램 게시글과 릴스의 형태로 홍보물을 만들 계획이 있다. 팀 영원의 기획은 크게 두 단계로 구분되는데, 세 종류의 사전 프로그램[13]을 진행한 뒤, 본 프로그램(공연)을 진행한다. 또,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을 위한 셔틀버스를 운영한다. 그 밖에도, 인디밴드 팬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면서도 기획 컨셉[14]에 맞는 자잘한 아이디어들이 마련되어 있다. 진희 님은 이 기획이 성공하면, ‘OO이가 보내는 편지’라는 이름의 시리즈 공연이 되어서 경기 광주시의 인디 생태계를 활성화할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전망을 내보이셨다. 다만, 큰 기획인 만큼 예산이 많이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이셨는데, 곧바로 예산을 많이 달라는 의미에서[15], 쇼츠에서 유행하는 밈(meme)을 현진 님과 함께 패러디하셨다.
책임GYM – 유혜림 님
혜림 님은 ‘(기획을) 이렇게밖에 못 만든 책임을 지금 지고 있다’는 말로 발표를 시작하셨다. 병묵 님도 그렇고 김월식 선생님 조는 정말 솔직함이 무기였다. 혜림 님은 이 과정에서 도망가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나중에 월식 선생님께서 혜림 님이 이 자리에 서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정도라고 말씀해 주셨다.
책임GYM은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책임을 다루는 우리의 감각을 ‘몸처럼’ 다뤄보는 기획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는 먼저, 각자의 ‘책임 인바디’를 측정한다. 책임의 근육을 본격적으로 단련하기 이전에 각자의 상태를 분석해야 역효과가 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운동을 할 때, 내 몸에 맞는 방식으로 하지 않으면 도리어 병이 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책임 인바디를 측정할 때는 주변인들에게 도움을 받아, 나에게 주어진 책임의 무게를 객관적으로 검토해 보는 과정을 거친다. 또한 내가 기질적으로 가진 책임감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사주(四主) 풀이 같은 것을 참조해 볼 수도 있다. 다양한 방식의 측정을 통해 책임 인바디를 만들고 나면, 그것을 참조하여 나에게 맞는 책임 루틴을 설계한다. 이후, 각자가 책임을 단련하며 실행한 바를 공유하고 서로 피드백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때, ‘가장 쓸모없는 책임은 무엇인가’와 같은 주제로 토론을 진행해 볼 수도 있다. 끝으로, 나만의 책임 루틴을 적용하여 밥을 먹는[17] ‘자유책임식사’에서 그간의 소감을 나누며 마무리한다.
혜림 님께서는 이 기획이 다양한 관점에서의 핑계거리만 만들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라는 말로 발표를 끝마치셨다.
서지혜 선생님께서는 거창하거나 복잡하지 않고 간결하게 드러나는 문제의식은 좋지만, 혜림 님의 발표에 기획서를 쓰게 된 맥락에 대한 설명이 누락되어 있어 아쉽다는 말씀을 해주셨다[18]. 덧붙여, 혜림 님이 본인에게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끌어내 건드렸다는 점이 너무 좋은 것 같다며, 책임GYM이 혜림 님 본인을 위한 과정이 될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고도 말씀해주셨다.
김월식 선생님께서는 책임을 더 잘 지기 위한 근육 단련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근육을 단련하는 것이 이 기획의 핵심인데, 그 점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하셨다. 한편, 주성진 선생님과 서지혜 선생님께서는 그런 기획 의도가 잘 이해되는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발표를 듣는 당시에는 주성진, 서지혜 선생님 의견에 동의했었는데, 글을 쓰려고 혜림 님의 기획서를 찬찬히 읽어보니까 발표에서 이 좋은 내용이 다 설명되지는 않았던 것 같아 김월식 선생님의 아쉬움이 이해가 되었다.
주성진 선생님께서는 기획의 컨셉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잘 잡았다고 칭찬해주셨다. 다만, 컨셉이 좋은 것에 비해 컨셉을 너무 아꼈다며, 더 “찐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예를 들면 기획 마지막에 ‘책임 바디프로필’ 같은 것을 찍어버리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눈치 ‧ 넘어 ‧ 보다 – 김소미 님, 이서연 님, 우인영 님, 박희언 님[19]
발표는 교육 현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시작되었다.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화면에 나온 네 장의 사진은 각각 다른 교실의 모습이라고 한다.
사진들은 이 팀의 문제의식을 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토록 몰개성한 교육활동들은 교사가 교육 현장에서 주체적일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교사들은 ‘눈치’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그 배후에는 크게 네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예산 편성 문제 등으로 학교 문화는 점점 폐쇄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둘째, 예민한 교육 현장의 분위기 때문에, 학생과 학부모를 대하는 데 감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많은 교사들이 ‘거리두기’와 ‘무관심’이라는 대처법을 선택한다. 셋째, 코로나19 이후 아이들은 “섬처럼” 파편적인 생활에 익숙해졌다. 겉도는 아이들이 걱정되어 학부모에게 연락해봐도, ‘우리 애는 원래 혼자서도 잘 지내요’라는 식의 답변이 돌아오곤 한다. 넷째, 교사들 간의 네트워크가 부족하다. 과중한 업무 때문에 교사들은 서로의 교육 철학에 대해 논의하고 소통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이러한 문제 인식을 바탕으로, 눈치‧넘어‧보다 팀은 교사 개개인의 재정비를 위한 기획을 고안하게 되었다. 기획은 10명 이하의 교사들을 대상으로, 총 2회차로 진행되며, 교사들의 감각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의 형식을 취한다. 1일차에는 시각, 미각, 촉각과 관련된 체험형 프로그램들이 진행되며, 2일차에는 1일차에 확장된 감각들을 참여자 스스로 바라보고 사색하며 표현하는 과정이 진행된다[20].
주성진 선생님께서는 주 40시간을 학교에서 일하는 교사들이, 이 12시간의 프로그램을 통해서 정말로 변화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셨다. 교사들의 관성을 실험하기 위해서는 좀 더 공격적인 기획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눈치‧넘어‧보다 팀의 기획안은 매우 구체적이고 정밀했다. 주성진 선생님께서는 이 기획이 문서상으로 구현된 만큼을 현실에서 구현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시며, 최악의 경우에는 이 기획도 저 게시판(맨 앞에 나온 사진들)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설명하셨다. 그러니 이 기획의 취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교사들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직업적 관성을, 새롭게 지배할 수 있을 정도의 드라마틱한 사건이 만들어져야 한다. 기획이 조금 삐끗하면 교사들은 이 기획은 자신들에 대한 질책이나 공격 정도로 인식하게 될 위험도 있다.
김월식 선생님께서는 여러 사람의 의견이 절충되면서 기획의 뾰족함이 사라지게 된 것 같다고 지적해 주셨다. 네 명이 서로서로 양보하게 되면서 특수성이 사라지고, ‘감각을 깨운다’와 같은 식의 추상적인 이야기들이 대두되었다는 것이다. 김월식 선생님은 교사들도 흔들려야 한다는 기획의 취지에는 공감하시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야생적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기획이 “렌지에 데워 먹는 편의점 음식”처럼 너무 다 짜여 있으면 오히려 선생님들의 야성성을 자극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나는 이 기획에서 홍보 방식이 뾰족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기획의 문제의식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내가 교사가 아니라서 가능한 것 같았다. 그리고 눈치‧넘어‧보다 팀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팀원 모두 교사가 아니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21]. 어떤 문제는 외부자의 시선에서 더 쉽게 보이는 법이니까. 자신의 일과 삶의 방식에 급진적이며 근본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천편일률적인 게시판을 보여주며, 이것 봐. 딱 봐도 잘못됐잖아! 라고 했을 때 기꺼이 수긍할 만큼 마음이 여유로운 교사가 내 생각에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았다.
- [1] 여느 학교 교장실에나 있을 법한 큰 태극기였다.
- [2] 이날 박희언 님은 아파서 불참하셨다.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았는데, 잘 회복하셨으면 좋겠다.
- [3] 이름을 적어주지 않으셨다. 아마 재단 측 심사위원일 것이다.
- [4] 혜림 님과 나는 서로의 것을 전혀 참조하지 않았다. 놀라운 우연의 일치.
- [5] 아마도 김월식 선생님의 도움과 첨삭을 받아 만들어진 사업계획서였을 것이다. 월식 선생님 조에서는 이미 몇 주 전부터 지원 양식에 맞는 사업계획서 작성을 연습하고 있었다.
- [6] 월식 선생님께서, 기획의 세부 실행 내용은 탄탄한데 기획의 목적이 흔들리면서 생긴 문제라고 지적해 주셨다. 그렇다면 세부 실행에 대한 부분에서는 별다른 수정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설마 목적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탄탄한 실행안을 새롭게 만들어 올 수 있었을까.
- [7] ‘속도’는 ‘속력’과 ‘방향’을 합친 말이라고 한다. 나는 이 뜻으로 사용했다. 병묵 님의 ‘속력’이 느리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싶다.
- [8] 누군가 말했다. 첫날 늦는 사람은 마지막에도 늦는 구만! 희주 님과 병윤 님을 두고 한 얘기였다. 개인 일정으로 바빠서 자주 못 나오신 두 분이다. 나는 두 분께서 이 과정을 완주하신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이 된다. 자주 빠지셔서 수업을 따라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 [9] 이전 글(12 주차 아카이브)에서 설명했던 내용이니 생략하겠다.
- [10] 이 부분 역시 12주차 아카이브 글을 참조하시면 좋습니다.
- [11] 팀 이름은 ‘영원’이다. 공연을 즐기는 행복한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인디밴드 팬들의 마음을 담았다.
- [12] 팀 영원에서 섭외하고자 하는 아티스트이다.
- [13] 커스텀 한정 향수 워크샵(인영 님과 함께), 방명록 작성, 서프라이즈 앵콜 럭키 드로우.
- [14] 진희 님께서는 밴드 해서웨이 멤버가 안 그래도 파자마 컨셉으로 공연해 보고 싶어 했다며, 기획 컨셉과 아티스트의 접점을 적극적으로 어필해 주셨다.
- [15] 달리 말해, 민심을 얻기 위해서.
- [16] 말이 씨가 되는 학교 초반에, 현진 님께서 관객과 무대 사이의 단차를 좁히는 여러 실험적인 기획을 해보고 싶다고 얘기해주신 적도 있었다.
- [17] 책임을 다루는 식사의 예시를 들어보자면, 자신의 감정을 우선적으로 책임지는 훈련을 하는 사람은 닭 다리 두 개를 다 먹어버릴 수도 있다.
- [18] 기획안에 있는 좋은 이야기들을 더 설명해달라고 요청받자, 혜림 님께서는 사업 계획서를 그냥 줄줄 읽으셨다.
- [19] 이 팀은 전원 교육 관련 업무 경험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 [20] 내가 압축적으로 요약하긴 했지만, 이 팀의 기획안에는 매우 구체적인 프로그램 내용들이 담겨 있다. 그 모든 것을 옮겨 적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여 세부적인 실행 방안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였다. 기획의 세부 사항은 눈치‧넘어‧보다 사업계획서에 매우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궁금한 사람은 그것을 참조하는 것이 좋다.
- [21] 심지어 팀원 모두 예술적인 방식으로 예술을 고민하는 예술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