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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더운 여름날, 안타깝게도 냉방에 문제가 생겼다. 에어컨이 고장 난 것은 아니고, 전기를 많이 써서 두꺼비집이 내려간 것 같았다(자세한 건 모르지만 어쨌든 수리 기사 님을 불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른 곳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는데, 부엌 쪽 식탁 자리는[1] 너무 더워서 가만히 있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주성진 선생님께서는 하는 수 없이 근처 설빙으로 조원 분들을 데리고 피신하셨다.

주성진 선생님께서 내게 복사를 부탁하신 것이 있어, 나는 다 인쇄된 종이들을 들고 설빙으로 따라갔다. 선생님께서는 부탁한 것을 깜빡하고 여기 와 버렸다며 조금 미안해하셨다. 때마침 조원들에게 빙수를 사 주려고 하니, 같이 먹고 가자고 말씀해 주셨다(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점심에 뭘 먹었는지 너무 배불러서 결국 못 먹고 나왔다. 내 사주에 먹을 복이 많다던데, 주성진 선생님께 얻어먹기는 왜 이리 어려운지). 진희 님께서 주성진 선생님의 크록스에 아주 귀여운 지비츠가 달려 있는데 보셨냐고 하시기에, 궁금해져서 키오스크 앞에 서 계신 주성진 선생님의 신발을 흘끗 보았다. 정말로 캐릭터 장식들이 여러 개 달려 있었다. 자녀 분은 없으신 걸로 아는데, 직접 고르셨겠지? 우리는 가게에서 직접 지비츠를 고르는 주성진 선생님의 모습을 상상하고 웃었다. 참고로 어린 따님이 있는 김월식 선생님께서는 휴대폰 케이스에 하츄핑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신다. 귀여우신 멘토 선생님들, 이라고 표현하면 예의가 아니려나.

다른 조도 마찬가지겠지만, 인디밴드 팀의 예산 책정은 쉽지 않아 보였다. 섭외할 아티스트에게 페이도 지불해야 하고, 대관료에 음향 장비 대여에 신경 쓸 게 아주 많았다. 이 팀은 공연 시작 전에 여러 사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또 식사까지 제공한다고 들었는데 예산이 부족하진 않을까 조금 걱정되었다. 섭외 장소 1순위는 지난번에 같이 가 보았던 무공간이었다. 그렇다면 산 아래에서 무공간까지 이동할 셔틀버스도 필요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건 예산이 남을 때나 고려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너무 주성진 선생님 조 얘기만 들은 것 같아서, 다른 조 얘기도 들으려고 일찍 자리를 떴다. 빙수를 못 먹은 건 아쉽지만 어차피 배불러서 몇 입 못 먹을 것 같았다. 설빙에서 나와 무늬만 뮤지엄으로 돌아가는 길에, 빨간 모자를 쓴 여성 분을 만났다. 희주 님이었다. 희주 님은 항상 화려한 패션 스타일을 보여주시는데, 옷이나 아이템들이 다 예쁘고 잘 어울려서 가끔 탐날 때가 있다. 그 빨간 모자는 정말 예뻤다. 색감이 강렬한 데도 전체적인 옷차림에서 어색하게 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냥 희주 님이 코디를 잘하셔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희주 님과 인사를 한 뒤, 볼펜이 필요하다면 제 것을 가져가시라고 했다. 희주 님은 볼펜은 있지만 이걸 가져가서 쓸게요, 말씀하시며 내 볼펜을(사실 김월식 선생님 것이다) 가져가셨다.

무늬만 뮤지엄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리 기사 님이 오셨다. 다행히 잘 해결되었다[2]. 서지혜 선생님 조에서는 벌써 기획안이 거의 다 완성되었는지, 두툼한 A4용지를 서로 나눠 읽고 있었다. 뭔가 복잡한 이야기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한창 바쁜 와중이라 내가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김월식 선생님 조로 갔다.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바빠 보였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다, 다음 주면 재단에 가서 기획안을 발표해야 하니까. 예산 책정 등등 여러모로 정신없을 때이다.

김월식 선생님께서 잠깐 다른 일을 하시는 동안, 나는 혜림 님과 둘이서 이야기하게 되었다. 지난 주말에 혜림 님은 김월식 선생님께 특강을 받으셨다고 했다. 그럼에도 아직 많은 어려움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는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혜림 님께서 스스로 답답하다고 느끼시는 부분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월식 선생님은 이제 혜림 님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3]).

당시에는 나름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글을 쓰는 시점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날 혜림 님과 나의 대화는 기획안 작성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하지만 그냥 수다를 떤 건 아니었다). 혜림 님은 책임감과 관련된 일종의 워크샵을 기획하고 계셨고, 헬스 PT 컨셉이었다(기획 타이틀이 ‘책임GYM’이었다). 각자의 책임감을 인바디(InBody)와 비슷한 형식으로 측정하는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그에 따라 저마다 맞는 방식의 트레이닝을 설계하는 것이 기획의 주요 과정이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일단 기획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고, 이제 혜림 님께서는 구체적인 세부 계획만 작성하면 되는 단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혜림 님은 어딘가 불만이 많아 보이셨다. 과연 어떤 부분이 문제일지 혜림 님과 대화를 나눠봤는데, 결론적으로 기획의 결말이 예측되지 않는다는 점이 혜림 님을 괴롭게 하는 부분이었다. 그것은 혜림 님의 책임감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었다. 문화 기획이라는 것 자체가 그 결과를 기획자조차도 다 예측할 수 없기 마련이지만[4], 혜림 님께서는 스스로 이 기획의 모든 부분을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 느끼셨고, (조금 변호하자면) 애초에 그런 벗어날 수 없는 책임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획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책임감의 딜레마.

나는 기획에 대해 조언하는 것이 익숙지 않다(스스로 기획해 본 적도 별로 없는데, 어떻게 조언을 많이 해봤겠는가). 대신에, 고민 상담은 꽤 많이 해본 편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평소에 고민이 많아서 그런가?). 그래서인지 혜림 님과 나의 대화는 기획에 대한 논의라기보다는 거의 고민 상담이었다. 책임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쉬려고 마음먹었을 때조차 편히 쉬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책임감에 조금 덜 시달리면서 살 수 있을까? 내 경험상으로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편이 나았다. 예를 들어, 수험생이 공부 이외의 활동을 일절 하지 않는다면, 그의 하루는 ‘공부를 하는 시간’과 ‘공부를 하지 못한 시간’ 두 가지로만 구분될 것이다. 다시 말해, 공부를 하지 않는 모든 시간이 ‘공부 안 한 시간’으로만 의미화된다. 그런데, 만약 그가 취미 활동을 해서, 하루가 ‘공부 시간’, ‘운동하는 시간’, ‘영화 보는 시간’ 등등 여러 갈래로 나눠진다면,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단순히 공부를 못한 것에 불과한, 실패자의 시간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시간을 분절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적극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도 중요하다(이 또한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 이야기이다). 거실 소파에 누워서는 맘 편히 쉬기가 어렵다. 집안 이곳저곳에서 할 일들이 너무 잘 보이기 때문이다. 그럴 땐 과감히 ‘피정’을 떠나야 한다. 집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 몸을 움직여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머릿속으로 암만 ‘일 생각 그만해야지’라고 되뇌어봤자, ‘어떻게 하면 생각을 안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5].

여기까지 얘기를 나눴을 때 월식 선생님께서 찾아오셨다. 우리가 이러이러한 얘기를 나눴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한 기획을 하지 말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우선, 책임 인바디를 어떻게 측정할지 논의해야 했다. 책임감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 테니, 책임감들이 적힌 카드를 나열해보고 신체의 어느 부분과 연관되는지 확인해 보면 좋을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최선을 다하기’라는 강박은 머리를 쓰는 것이고 ‘좋은 아들/딸 되기(효도하기)’는 마음(심장)을 다하는 것이라고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가족구성원 혹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누군가에게 질문지를 주고, 내가 져야 할 책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물어보는 활동도 괜찮을 것 같았다. 활동을 통해 내가 가지고 있던 책임감이 사실 아무도 나에게 요구하지 않았던 것임[6]을 알게 되거나, 반대로 나는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가까운 상대가 나에게 요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질문지도 그냥 백지로 주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책임을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책임, 사회인으로서의 책임, (내 삶에 대해 내가 책임지는) 실존적인 책임 등으로 세분화하여 각각의 구체적인 책임 사항이 무엇인지 적게 하는 것이 더 나아 보였다. 하지만 이런 자잘한 얘기들이 혜림 님의 고통을 해소해 주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혜림 님의 스트레스는 좀 더 심층적인 어딘가에 있었다. 기획서를 쓰는 것 자체가 고민인 게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가 기획서를 쓰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1. [1] 조별 토의 시간이 되면, 우리는 조마다 위치가 정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늘 똑같은 자리에 모여 앉았다. 주성진 선생님 조는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부엌 쪽 식탁에, 서지혜 선생님 조는 안쪽 큰 공간에, 김월식 선생님 조는 바로 옆 사무실에 모였다. 언젠가부터 계속 그랬다.
  2. [2] 사실 무늬만 뮤지엄의 모든 에어컨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어서, 서지혜 선생님 조와 김월식 선생님 조가 있는 곳은 원래도 견딜 만했다.
  3. [3] 그리고 월식 선생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4. [4] 게다가 멘토 선생님들께서는 ‘결과가 예측되는’ 기획이 어떻게 참여자를 대상화시키는지 줄창 말씀해 주셨다.
  5. [5] 그래서 생각을 비우는 데는 여러 장치들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는 그냥 생각을 비우려 하지 않고 먼저 ‘화두’를 던진다. ‘이 뭐꼬?’ 답 없는 질문을 계속해서 묻다 보면, 생각이 비워지고, 도가 트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6. [6] 요즘엔 이런 유행어도 있다. ‘누칼협’. ‘누가 칼 들고 협박했나요?’라는 뜻이다. 아무도 당신에게 그러라고 요구하지 않았는데 왜 사서 고생하냐는 의미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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