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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윤 님은 인디밴드 팀의 피실험자일 뿐만 아니라, 무대 감독과 프로젝션 영상 감독까지 맡게 되었다(주성진 선생님께서 시키셨다). 프로 기획자인 주성진 선생님의 안목은 정확했다. 선생님께서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시키신 일들[2]을 병윤 님은 매우 성실히 준비해오셨기 때문이다.
병윤 님은 가방에서 큰 공책을 꺼내어 보여주셨다. 인디밴드 팀을 위한 무대 디자인이었다. ‘루트플랜트’라는 카페에서 공연한다고 가정하고, 그 공간에 맞는 설계도를 그려오신 것이다.
나는 같이 따라가고 싶었다. 그래서 곧장 사무실로 들어가, 한창 얘기 중이신 월식 선생님께 말씀드렸다(있잖아요 쌤~ 주성진 선생님 조는요, 이제 공간 리서치하려고 다같이 차 타고 이동한대요⋯⋯). 월식 선생님께서는 쿨하게 말씀하셨다. 너도 갔다 와.
그리하여 다섯 명이 차 한 대에 낑겨 타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희주 님은 늦게 합류하셨다[3]). 우리는 우선 작은연못숲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휴무 날이었다. 주성진 선생님과 병윤 님이 차에서 내려 인기척 없는 공간을 확인해 보셨다(힘겹게 뒷자리에 낑겨 앉은 세 여자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대충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차창 너머로 슥 쳐다본 바, 나쁘진 않아 보였다.
무공간까지는 차를 타고 좀 더 이동해야 했다. 주성진 선생님께서 무공간이 서지혜 선생님 집 근처에 있다는 것을 참고로 알려주셨다(서지혜 선생님께서 자주 방문하신다고 한다). 만약 서지혜 선생님께서 그곳 사장님과 친분이 있으시다면, 어떻게 인맥으로 일을 좀 성사시켜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조금씩 비가 왔다. 빗방울이 차창을 타닥타닥 때리고, 우리가 탄 자동차는 산 위로 올라갔다. 근처에 무덤들이 보였다. 마치 공포영화의 주인공 일당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지 말라는 곳에 꼭 들어가서 낭패를 보는 그런 등장인물들 말이다. 나는 광주의 풍수지리를 떠올렸다. 광주는 좋은 묫자리다(능평동이 괜히 ‘능’평동이겠는가?). 이왕 생각난 김에 그걸 말했더니 분위기는 더 이상해졌다. 언젠가 해서웨이에 무서운 것을 정말 싫어하는 멤버가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현진 님께 물어보니 자기도 그 멤버가 여기까지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도착해 보니 무공간은 꽤 멋진 곳이었다. 깊은 산속에 있지만 으스스한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초록으로 둘러싸인 모습이 무척 신비롭고 힙(hip)해 보였다. 오는 길이 험해서 셔틀버스가 필요할 것 같긴 했지만. 들어가 보니 내부 인테리어도 마음에 들었다. 현대적으로 해석한 절 같기도 하고, 일본식 목조 건물 느낌도 나고⋯⋯. 거기서 파는 빵도 맛있어 보였는데, 점심에 뭘 먹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너무 배불러서 입에도 못 댔다. 아쉬웠다[4].
우리는 커피와 차를 마시며 기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밴드 멤버들과 향수를 조향[5]한 뒤 그걸 이 공간에 뿌려두면 어떻겠냐는 얘기도 나왔고, 공연 컨셉에 맞춘 시그니처 음료수를 제작하자는 의견도 나왔다[6]. 밴드 멤버들에 대한 퀴즈를 맞히는 ‘아티스트 모의고사’를 보자는 얘기까지 나오게 되자, 주성진 선생님께서 이제 사전 프로그램에 대한 얘기는 그만하고, 본 프로그램부터 어떻게 할지 말해보자고 하셨다.
진희 님이 공연을 파자마 파티 컨셉으로 기획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 주셨고, 현진 님도 동의하셨다. 밴드 멤버들이 관객들을 마치 자기 집에 초대한 것처럼 꾸며놓으면 좋을 것 같았다. 아예 누워서 공연을 관람하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바닥이 (당연히) 딱딱하므로, 빈백 같은 것을 가져다 놓아야 할 것이다. 또, 밴드 섭외에 관해서는, 현진 님은 해서웨이 멤버들이 현진 님의 얼굴을 알 정도로 열렬한 팬이시고, 진희 님은 애인의 친동생이 잭킹콩 멤버이므로 두 팀 모두 섭외에 있어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뒤늦게 희주 님이 오셨다. 희주 님은 항상 바빠 보인다. 늘 머리 스타일이 화려하신 희주 님께서 이번에는 분홍색으로 염색을 하고 오셨는데, 희주 님의 피곤해 보이는 눈빛과 핫핑크색 머리카락이 서로 다른 에너지를 내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안 어울렸다는 뜻은 아니다. 핫핑크색은 희주 님께 찰떡같이 어울렸다). 희주 님께서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 머리를 꾸미게 된다고 말씀해 주셨다. 예쁘다고만 생각했는데, 저런, 예술노동자의 애환이 깃든 머리칼이었다니! (나는 희주 님께, 그래도 색은 예뻐요~라고 말씀드렸는데, 왜인지 꼽을 준 것처럼 들리는 바람에 해명해야 했다)
희주 님께서는 기획에 대한 장문의 설명을 적어와주셨다. 구체적인 기획 방안이라기보다는 (희주 님 기획에서 핵심적인 키워드인)‘어중간함’에 대한 고찰이었다. 먼저, 희주 님은 ‘어중간’함과 ‘애매’함이 어떻게 다른지부터 설명해주셨다. 희주 님에 의하면, 우리는 나 자신 혹은 나와 관계된 사람들에게는 ‘어중간’하다고 표현한다. 예를 들면, “나는 좀 어중간한 것 같애”, “우리 좀 어중간하지 않나?”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이때, 어중간하다는 표현에는 약간 부정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다. 한편, 사물을 대상으로는 보통 ‘애매’하다는 표현을 쓴다(이때는 중립적인 뉘앙스이다). 또, 싫어하는 사람을 대상으로도 애매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다(확실히 부정적인 뉘앙스로). 예를 들어, “이 옷은 좀 애매하다”, “아, 쟤는 좀 애매해” 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또한 희주 님께서는 아래와 같이 ‘어중간함’이라는 정서를 맵핑할 수 있으며, ‘어중간함’, ‘정체성’, ‘소속감’ 등의 개념에 대한 조작적인 정의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셨다. (나에게는 이러한 조작적 정의가 쉽지 않다. 인문학을 전공하면서 겪게 되는 문제이다. 인문학은 사람에 대한 학문이지만, 인문학 과제에서 내 직관적인 생각을 그대로 얘기했다간 교수님께 아주 날카로운 비판을 듣게 된다. 심한 경우엔 리포트 전체에 X자가 쳐지기도 한다고 들었다. 너무 무섭다. 그래서 나는 단언을 잘 못하는 편이다(지금도 “잘 못하는 편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오랜만에 이런 단정적인 어조의 글을 읽어보았다. 나는 이 글이 희주 님의 기획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느꼈다. 주성진 선생님께서도 이런 단정적인 말들이 아주 좋은 것 같다고 얘기해주셨다)
◉ 어중간함의 정서 맵핑
어중간함은 단일한 상태가 아니라, 다양한 결의 경계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 관계적 어중간함: 친구도 애인도 아닌, 모호한 관계
- 조직 내 어중간함: 속해 있지만 소속감은 없는 팀원
- 공간적 어중간함: 고향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도시 거주자
- 표현의 어중간함: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아무 감정도 없는 건 아닌 상태
- 감정의 어중간함: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그냥 그런’ 날들
◉ 조작적 정의
- 어중간함: 사회가 요구하는 명확한 선택이나 위치에 속하지 못한 상태
- 정체성: 스스로를 설명할 언어를 갖지 못한, 혹은 설명되기를 거부당한 존재의 감각
- 소속감: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지만, 어딘가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어중간함은 단일한 상태가 아니라, 다양한 결의 경계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 관계적 어중간함: 친구도 애인도 아닌, 모호한 관계
- 조직 내 어중간함: 속해 있지만 소속감은 없는 팀원
- 공간적 어중간함: 고향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도시 거주자
- 표현의 어중간함: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아무 감정도 없는 건 아닌 상태
- 감정의 어중간함: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그냥 그런’ 날들
◉ 조작적 정의
- 어중간함: 사회가 요구하는 명확한 선택이나 위치에 속하지 못한 상태
- 정체성: 스스로를 설명할 언어를 갖지 못한, 혹은 설명되기를 거부당한 존재의 감각
- 소속감: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지만, 어딘가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이러한 조작적 정의에는 한국 사회 저변에 대한 희주 님의 비판적 의식이 깔려 있다. 이에 대해서는 희주 님의 글을 인용함으로써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주성진 선생님께서 희주 님께 이 기획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물어보셨다. “너 어중간하지 않아”라고 말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어중간해도 돼”라고 말하려는 것인지 묻는 것이었다. 희주 님께서는 두 입장을 다 포괄하는 기획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개개인이 어중간한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적인 한국 사회 구조에 대한 희주 님의 비판적 입장이었다. 주성진 선생님께서는 다시 질문하셨다. 어쨌든 그런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① 어중간함을 선택해야 하는가?, ② 아니면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③ 뭘 선택해도 똑같음, 세상이 X같아서⋯⋯라는 입장인가? 이에 대해 희주 님께서는 좀 더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말씀하셨다.
또, 희주 님께서는 “사람을 소비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획하고자 한다고 적어주셨는데,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 중이라고 하셨다. 우선은 참여자에게 고백이나 노출을 요구하지 않으며,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각자의 참여가 티 나지 않는 기획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참여자들에게 익명으로 기록물들을 받아서 전시를 하는 것도 고려해 보셨다고 한다. 하지만 거창한 퍼포먼스보다는 일상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좋겠다고 덧붙이셨다. 어쨌든 이 기획의 핵심은 ‘정체성은 없지만 소속감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어중간함을 기념(celebrate)’하는 것이다.
- [1] 병윤 님의 최애(최고로 애정하는) 곡은 hathaw9y(해서웨이)의 ‘World Tour’.
- [2]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아무래도 강제로 시킬 수는 없는 일이니까.
- [3] 그래서 돌아갈 때는 6명이 한 차에 같이 탔다.
- [4] 생각해 보니 월식 선생님께서 오뎅과 물떡을 준비해주신 날이었다. 빵보다 맛있는 오뎅과 물떡을 먹었으니 큰 후회는 없다.
- [5] 이때, 인영 님을 초청하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 [6] 몰랐는데 현진 님께서 카페를 운영하신 경력이 있으셨다. 현진 님께서 직접 메뉴 제작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