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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멘토 선생님들의 긴 이야기를 들었으니, 오늘은 참여자들이 함께 서로를 알아갈 차례다. 아직은 나도 (참여자분들에 대한 호기심은 많았지만) 한 분 한 분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1].

생각보다 수업 전에 일찍 도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월식 선생님께서는 다과 대신에 직접 삶은 옥수수와 감자, 고구마를 준비하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밥을 조금만 먹고 올걸 하고 다들 후회했다. 옥수수가 달고 맛있어서 나도 점심을 좀 덜 먹을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께서 식은 감자가 맛있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못 먹어봐서 아쉬웠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서로 어색하게 휴대폰만 봐야 하는 상황이 좀 그래서 룬문자를 가져왔다. 이건 말하자면 간략화된 타로카드 같은 것이다. 사주를 보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사주 풀이는 한 사람에게 집중해야 하니까, 여러 사람이 대화하게 만들기에 좋은 소재는 아니다. 내 인생을 가지고 스몰 토크를 하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룬문자는 모양도 예쁘고 단순해서 가지고 놀기 딱 좋다. 오픈할 수 있는 가벼운 질문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다만 룬문자를 꺼내는 순간에는 필요 이상으로 엄숙한 분위기가 조성돼 버려서 조금 민망하긴 했다. 그래도 얘기하다 보니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대화 도구가 되었다. 나는 이현진 님의 학부 졸업 여부를 점쳐드렸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대학원도 아니고 학부를 졸업하는 데 학생이 점까지 보게 만드는 교수님은 좀 너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을 전공하신 현진 님은 졸업 전시를 위해 준비 중인 작업 포트폴리오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3D 모델링 (정확한 워딩인지는 모르겠다) 작업물들이었는데, 세상에, 진짜 사진 같았다! 뭐 하나 만드는 데 시간이 몇 주씩 걸린다고 했는데, 이 정도로 꼼꼼하고 자기 곤조가 있는 사람이라면 교수님께서도 제자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응원해 주셔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지각할 수밖에 없는 분들을 제외하고) 사람들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주성진 선생님께서 매우 신기한 조 나누기 방식을 제안하셨는데, 그 절차는 이러하다. 우선 한 명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질문자와 동일한 사람이 다섯 명 모이면, 질문자가 멘토를 선택해서 하나의 조를 이룬다. 예를 들면, 누군가 ‘강아지가 좋아, 고양이가 좋아?’와 같은 질문을 하고, 자기는 강아지가 더 좋다고 말한다. 그러면 모두 눈을 감고, 강아지가 더 좋은 사람은 손을 든다. 손을 든 사람이 다섯 명이 되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하나의 조가 되는 것이다. 재미는 있어 보이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 딱 다섯 명을 맞추기는 쉽지 않을 텐데. 하지만 나의 걱정과 달리 생각보다 빨리 조가 결성되었다. 또한 조를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게 큰 장점이었다. 기획자의 노련함이란 이런 것인가? 역시... 나는 한참 먼 것 같다.

박희언 님이 “사람 좋아하는 사람”을 제안했고,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이 손들었다. 희언 님은 김월식 선생님을 가장 사람을 좋아하실 것 같다는 이유로 선택했다. 그게 처음 결성된 조였으므로 그 뒤에 무슨 재미있는 질문들이 나왔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우리 조는 월식 선생님께서 주로 업무를 보시는, 무늬만 뮤지엄의 사무 공간으로 가서 모여 앉았다. 희언 님의 기대와는 달리 김월식 선생님께서는 자신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을 많이 만나기는 하지만, 막 끈끈하고 돈독한 그런 관계는 싫다고 하시면서[2].

월식 선생님께서는 사람에는 관심이 없지만, 에는 관심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삶이라는 건 말하자면 ‘서사’다. 선생님께서는 자기 서사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은 기획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시며, 기획이라는 게 반드시 거창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함께 생각해 보았다. 오늘 했던 가장 사소한 기획적인 것은 무엇일까? 예를 들면, 우리가 아침에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하는 것도 하나의 기획일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전날 밤에 미리 기획해 놓았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아침밥도 기획이 될 수 있다. 요즘 매일 아침 메뉴 선정을 고민하고 있다고 하신 분이 있었는데[3], 최근 미국에서 돌아오신 할머님과 같이 식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식빵 하나를 굽더라도 토스트로 할지 계란물을 입힐지 고민이라고 하셨다. 식사 콘셉트는 바로 ‘꾸안꾸’. 열심히 차린 듯 안 차린 듯, 할머님의 입맛을 충족시키는 것이 주된 과제였다.

선생님께서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키워드를 제안하신 희언 님께 뭘 하고 싶으시냐고 물어보셨다. 희언 님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획”이라고 설명하셨다. 사람들이 너무 사랑에 궁핍한 것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를 두고, 월식 선생님께서는 ‘너무 착하다’고 평하셨다) 희언 님은 사람들이 사랑에 이리도 궁핍해지게 된 이유는 각자의 애착 유형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도 진단하셨는데, 희언 님에 의하면 애착 유형을 자신을 인지하는 발판으로 삼아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인정한다면 우리 사회의 혐오와 같은 문제가 이렇게 심각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희언 님의 말씀을 듣다가 웃긴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예술 관련 밈(meme)을 만드는 인플루언서가 있는데, 그분이 한동안 인스타그램을 통해 Q&A를 진행했었다. 인터넷의 익명성 때문인지 정말 온갖 사람들이 미친 질문을 해댔는데, 어떤 사람은 그냥 ‘섹스하고 싶다’ 이런 식으로만 말했다. 마치 자신의 욕정을 누군지도 모를 타인에게 배설해 버리듯이. 그 인플루언서는 이런 내용의 짤로 답했다. 너는 섹스를 원하는 게 아니야. 네 무의식에 있는 유년 시절의 결핍 등등을 깨달아야 해⋯⋯. 당시에 너무 웃겨서 캡쳐를 해두었는데, 아이폰 유저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휴대폰 사진첩 정리를 안 해놓았기 때문에 찾을 수 없어 아쉽다.

김세아 님은 ‘인간은 좋은데 한 사람 한 사람과의 관계는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반면에, 기획은 작고 소소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기획이 좋다고 하셨다. 마치 “나부터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획을. 세아 님은 사실 이 수업에서 이미 기획을 진행하고 계셨는데, 바로 수업에 오기 전에 ‘포기하지 않기’로 매번 결심하는 것이었다. 지난 강연 때, 월식 선생님께서 하루에 5초 동안 할 수 있는 기획을 실천해보는 것을 제안하셨었는데, 세아 님께는 “이거 끝까지 다닐 수 있다”고 다짐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5초 짜리 기획이었다.

김소미 님은 사람을 너무 좋아하고, 관계가 없으면 외로움을 느낀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사람에게 상처도 받을 거면 일찍 받는 편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내가 사람을 소미 님만큼 많이 좋아하는 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 부분에서는 매우 동감이었다. 나는 내가 사람들을 애정하는 데 있어 손해를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두를 애정해버리고, 배신당하면 그때 가서 복수를 하든 무시를 하든 하는 게 더 낫다고 중학생 때부터 생각했었다. 소미 님께서는 MBTI로 치면 E 중의 E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 말 없이도 편한 친구를 만들고 싶다고 덧붙이셨다. 나는 이 부분에서도 크게 동의했다. 예전에 나와 친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저는 친구 사이에서, 침묵이 얼마나 편안한지가 친밀함의 척도인 것 같다고 생각해요”. 상대방도 이 말에 매우 동의했었던 기억이 난다[4].

쉬는 시간을 가진 뒤에, 조를 다시 짰다. 이번에는 주성진 선생님과 한 팀을 이루게 되었다. 질문은 뭐였는지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아마도 ‘목살보다 삼겹살이 더 좋다’ 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 질문을 하신 이희주 님께서 남양주에 있는 ‘덕소정육부대’를 강력 추천하셔서 노트에 적어두었다.

나는 아카이빙을 위해서 개인 노트에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적어두는 편인데, 이번 조에서는 거의 적지 못했다. 주성진 선생님께서는 광주문화재단에서 일하는 최보라 님께 최근에 하고 있는 고민이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보셨다. 최보라 님께서는 연애가 가장 큰 고민거리라고 답하셨는데, 그 이유인 즉슨 삼 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적어도 되나 싶어서 뭘 적어두지 못 했었다. 주성진 선생님께서는 마치 연애 서바이벌 프로그램 출연자처럼 최보라 님의 연애관에 대해서 집요하게 물어보셨다. 만약 그게 카페에서 엿듣는 대화였다면 남자가 여자에게 관심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튼 듣는 입장에서는 재밌었는데 여기에 적기는 아무래도 좀 그러니까...

그리고 이희주 님과 정병묵 님께서 굉장히 많은 말씀을 하셨다. 두 분 다 MBTI가 완전 T이고, 업무를 방해받는 걸 극도로 싫어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강한 통제력을 지니고 있으셨다. 예컨대, 술에 취해도 저얼대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내가 그건 술에 덜 취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질문했더니, 병묵 님은 필름이 끊기니까 취한 건 맞다고 주장하셨다. 희주 님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술을 깨야 한다는 생각을 하시고는, 실제로 술을 다 깨고 잠드신다고 한다. 나도 MBTI T성향이 강한 편인데, 이분들의 얘기를 듣다 보니 나는 T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성진 선생님께서 농담으로, 정병묵 님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저기에 하수구가 있으니 저기 가서 토를 해야지, 하수구가 세로 방향으로 되어 있으니 나도 세로로 몸을 돌리고 토를 뱉어야지’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냐고 물어보셨는데 병묵 님은 거의 그렇다고 대답하셨다. 물론 세로 방향으로 토를 하진 않았겠지만, 여하튼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화를 할 때, 사람들이 골고루 말하게 하는 것을 조금 신경 쓰는 편이다. 왜냐하면 내가 말이 너무 많아서, 주의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말할 틈을 주는 것을 깜빡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생각 자체에 조금 의문이 들었다. 말이 많은 사람은 발언 기회나 시간이 제한 없이 주어졌을 때 그 진가가 잘 드러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은 주변이 조용할 때 빛이 나는 법이다. 더욱이, 이 ‘말이 씨가 되는 문화기획학교’에서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말을 제한하는 게 더더욱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고유한 매력을 원 없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으니까, 차차 알아가면 될 것이긴 하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던 당시에는 내 내면에서 이 부분을 신경 쓰고 있긴 했다)

주성진 선생님께서 내게 왜 종교학과에 가게 되었냐고 물어보셔서, 대화가 자연스럽게 종교학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종교와 종교학에 관심 있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희주 님은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오래 하셨는데, 그때 친구들이 거의 다 기독교인이라서 술자리 대화에 끼기 위해 종교학을 공부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해외 유학 생활 도중에는 한인 교회랑 연결될 일이 어떻게든 생기기 마련인데, 희주 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회에 가게 된 희주 님께서는 종교학 지식들을 바탕으로 그곳 사람들에게 비판적인 질문들을 많이 하셨고, 끝내 ‘사탄’이라는 소리까지 들으시게 되었다. 나는 약간 실례가 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래서... 원래는 친구를 사귀려고 종교학을 공부했다는 말씀이시죠?” 희주 님께서는 하하 웃으셨다. 희주 님께서는 “되게 재밌는게”라는 표현을 습관처럼 사용하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희주 님의 이야기가 되게 재밌게 들렸다.



  1. [1] 그나마 알고 있는 사람은 이희주 님뿐이었다. 첫날에 예쁜 파란색 머리를 하고 오셔서 기억에 남았다. 또 발목에 깁스를 하고 오신 게 신경이 조금 쓰이기도 했다. 무늬만 뮤지엄은 2층이라서 걸어 올라오기 버거운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엘리베이터는 없으니까. 또, 희주 님과는 지난번에 잠깐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다. 일정이 끝나고 집에 가야 하는데, 데리러 올 사람이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셔서 월식 선생님과 셋이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희주 님의 그림 포트폴리오도 구경할 수 있었다. 어... 그런데 사실 희주 님을 제일 먼저 기억하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자기소개 시간에 희주 님께서 10년 동안 부업으로 사주 상담을 했다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약간 쫄렸다. 김월식 선생님께서 나를 ‘사주 풀이의 대가’라고 소개하시지 않았던가. 물론 내가 배운 것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치만 세월 앞에서는...! (그런 고로 너무 나대진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2]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월식 선생님이 하신 그 수많은 작업들이 선생님의 사람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사람에 대한 애정 없이, 나와 다른 삶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함께 대화를 나누던 그곳조차도 타자와 함께하는 예술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이를테면 폐지를 수집하는 어르신 108명의 폐지를 구입해서 만든 폐지 불상의 머리가 책꽂이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3. [3] 이름을 적어놓지 않았다니! 아뿔싸. 기억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사실 누구인지 짐작은 가지만 약간 헷갈리는 바람에, 잘못 적는 것보다는 안 적는 게 덜 섭섭하다 싶어 이렇게 구차한 변명을 남겨 봅니다...
  4. [4] 지금은 그 사람과 별다른 연락을 하고 있지 않아서 그와 내가 친밀하고 있는 중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이것도 어찌 보면 각자 편안한 침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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