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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느냐면, 내가 쓰는 글들이 몇몇 사람들에게는 다소 억울함을 발생시켰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 발생시키리라는 것을 나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글이지만, 오해가 발생하는 것을 나는 막을 수 없다. 글이란 본질적으로도 그러하며, 더군다나 나는 신체의 모든 감각기관이 예민한 편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가는 귀가 먹은’ 편이다. 나는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해서 상대방의 말을 세 번째 못 알아들었을 즈음엔 적당히 미소를 지으며 끄덕이는 습관을 들였다.
너무 많은 오해가 발생할 것이므로, 내가 그것들을 매번 바로잡을 수 없음에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하지만 정병묵 님의 억울함에 대해서는 특별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병묵 님께서는 살면서 술 먹고 필름 끊겨본 적이 없으시다고 한다. 이분의 억울함을 특별히 고려하게 된 까닭은, 정병묵 님의 완벽주의적인(?) 음주 인생 서사에 내가 감히 흠집을 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술을 좋아하시는데도[2] 한 번도 만취해보지 않은 삶을 살아오는 데에는 얼마나 많은 서사가 있었겠는가. 그것은 병묵 님만의 고유함이고, 나는 응당 존중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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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간에는 참여자분들이 자신의 멘토 선생님을 찾아야 한다. 일단, 오늘까지는 저번처럼 조를 나눠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이번에는 질문으로 조를 짜는 대신, 지난번에 안 만나 본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 조에서 이야기 나눈 것들을 토대로, 전체가 모여 여러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수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주성진 선생님께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그림으로 정리해 주셨다. 5월 22일자의 그림을 보면, 방금 소개한 조별 대화와 전체 대화의 과정이 나타나 있다. 참고로 다음 주에는 발표가 예정되어 있으며, 그다음 주에는 김소미 님의 도자 공방 텃밭에 간다고 한다. (6월 12일은 뭔지 기억이 안 난다. 산으로 강으로 놀러가나?)
나는 지난 시간에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던 서지혜 선생님과 함께하게 되었다. (우리 조는 나, 서지혜 선생님, 유혜림 님, 김세아 님, 이렇게 네 명뿐이었다) 서지혜 선생님께서 ‘가장 최근의 내 상태를 많이 반영하는 사물’이 무엇인지 물어보셨다. 나는 최근에 산 휴대용 키보드를 꺼냈다. 아주 가벼운 블루투스 키보드이다. 이걸로 요즘엔 어디서든 틈만 나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머릿속으로 말하면서 생각을 전개하는 습관이 있는데, 손가락으로 타자를 치면서 생각하면 머릿속 발화의 속도가 더듬거려져서 좋다. 요즘에는 타이핑을 하지 않을 때에도 그런 속도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유혜림 님은 5주차 과제로 공유해 주셨던 자동차 번호판 사진을 고르셨다. 같은 번호 네 자리로 구성된 자동차 번호판을 사진으로 남기는 일은, 말하자면 ‘특정한 규정 안에서 생각나는 재미’였다. 그것이 혜림 님의 취향을 관통하는 서사인 것 같았다. 옷을 고를 때에도 기본적인 디자인에 자신만 알 수 있는 정도의 포인트가 들어간 것이 좋다고 하셨다. “튀지 않는, 살짝 깨진 규칙”. 그것이 혜림 님의 일상을 즐겁게 했다. 혜림 님은 어차피 해야 하는 것이라면, ‘변주’로써 놀이화하는 것이 좋다고 덧붙이셨다. 자동차 번호판 사진을 수집하면서, 늘 해야 하는 일 중 하나인 운전이 즐거워진 것처럼 말이다.
김세아 님은 바로 앞에 놓여있던 물병이 자신의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속이 비치는 투명한 물병이었다. 최근에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물병을 들고 다니게 되었는데, 속이 다 비쳐서 내용물이 무엇인지 주변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다는 게 조금 신경 쓰이셨다고 한다. 그 지점에서 세아 님은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셨다. 세아 님은 스스로가 ‘백지 상태’나 다름 없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동시에 뭘 넣어도 밑천이 다 드러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궁금했다, 정말로 백지 상태일 때는 나를 숨기는 것이 어려워지게 될까? 그렇다면 초심자는 뭐든 다 들킬 수밖에 없는 걸까? 세상에는 처음 해보는 일들이 아주 많을 것이고, 그 모든 일들에서 나는 능숙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어떤 일은 조금 더 빨리 배우고, 또 어떤 일은 남들보다 훨씬 더디게 배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나의 역량이나 재능 따위를 발견하는 주요한 척도일까? 한 번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인 것 같다. 직관적으로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떨어지는 빗방울도 지면에 가까워질수록 중력가속도가 붙지 않는가. 구름 속의 수증기는 자신이 얼마나 무거워질 수 있는지 또 얼마나 가벼워질 수 있는지 예상할 수 없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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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별 대화 시간이 끝나고 모든 참여자들과 멘토 선생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다른 조에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오간 것 같았다. 김월식 선생님의 조에서 공유되었던 아이디어 중 하나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최근에, 어쩌다 보니(?) 대한민국은 대통령 자리가 공석이 되었고, 우리는 갑작스럽게 치러질 선거를 앞두고 있다. 때문에 유명 정치인의 얼굴이 크게 인쇄되어 있는 현수막을 전국 어디서든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많은 홍보물들은 선거가 지나면 곧장 쓰레기가 될 것이다. 선거에서 이긴 쪽이라고 해서 그것들을 기념물로 가져가는 것도 아니니까. 이를 두고, 어떤 분께서 아이디어를 냈다. 선거 홍보 현수막들을 리사이클링 하는 것이다. 예컨대, 김문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프린팅된 가방 따위를 만들어 볼 수 있겠다. 정말 재미있고, 사회적으로도 유익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왕이면 인기 없는 군소정당 후보의 현수막으로 만들어진 에코백을 가지고 싶다.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정당의 것이니 한정판이라는 느낌도 있고, 무엇보다도 이재명이나 김문수나 이준석이나 황교안 얼굴 가방이라면 택시를 탈 때 기사님들이 좀처럼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다. (음, 사실은 일단 우리 부모님부터 뭐라고 할 것 같긴 하다)
김세아 님께서는 조별 대화 시간에 나왔던 아이디어를 모두에게 공유해 주셨다. 아직 구체화 되지는 않았지만, ‘명함’을 만드는 기획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지난번에 몇몇 분들께서 자신의 명함을 모두에게 선물처럼 주셨었다. 다양한 디자인의 명함을 볼 수 있어 모두 즐거운 경험이었다. 세아 님께서는 명함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만의 명함을 만들어서 다 같이 나눠 가지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주셨다. 나는 예전부터 직함 없는 명함 같은 것을 하나 만들어서 친구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 건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세아 님의 아이디어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한편, 유혜림 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들키지 않고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쓰는 것’을 삶의 모토처럼 가지고 계셨는데, 혜림 님이라면 그런 예술적인 명함을 만드는 것이 부담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혜림 님처럼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아주 몰개성한 디자인의 명함을 만드는 대신, 자신의 정체(직업 등)를 안 적어놓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말하자면, 그냥 이름표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자신을 들키지 않으면서도, ‘들키고 싶지 않음’이라는 고유한 감정이나 정체성을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주성진 선생님께서는 그런 명함을 만들면 상대방이 여기에 왜 직업이 안 적혀 있냐고 물어보면서 혜림 님을 귀찮게 할 것이고, 또 그러한 질문을 마주함으로써 혜림 님은 자신을 숨기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지적해 주셨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명함은 갤러리에 전시되어있는 게 아니라면, 당사자를 훨씬 더 귀찮게 할 것이었다. 주성진 선생님께서는 기획의 타겟팅이 모두를 향할 수 없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모두에게 알려주셨다.
이름표가 보이지 않는[3] 어떤 참여자 분께서는 ‘진짜 하기 싫은 것 해보기’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해 주셨다. (와, 그것 참 진짜 하기 싫겠군!) 나는 궁금해졌다. ‘진짜 하기 싫은’ 걸 어떻게 실천해보지? 그냥 꾹 참고 하면 되는 건가? 놀랍게도 이 아이디어를 주신 분께서는 ‘진짜 하기 싫은 것 해보기’의 예시로 ‘설거지 미루기’를 제안해 주셨다. 설거지 안 미루기가 아니다. 설거지를 미루는 것이 그분께는 정말로 참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저분께서 만약 내 자취방을 보신다면, 정말 기겁하시겠군⋯⋯!) 정말로 성실하신 분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설거지 안 해보기’를 실천하면서, 남는 시간에 자신이 어떤 일을 할지 알아보고 싶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는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참고로 나, 이소정은 그런 건 궁금해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4]) 김월식 선생님께서는 기획의 태도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해 주셨다. 기획을 할 때는 그 기획의 욕망이 어디서 시작하는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말씀해 주셨다. 요컨대, 설거지를 미뤄보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설거지를 안 해서 남는 시간을 대하는 ‘나 자신’의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정병묵 님께서는 설거지를 쌓아두고 그 시간에 감상문을 써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 주셨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매우 효율적으로 살고 계신 게 분명한) 참여자 분께서 “진짜 하기 싫은” 것 같은 표정을 지으셨다.
허진희 님께서는 ‘감정’을 주제로 한 소통 방식을 고민 중이라고 하셨다. 최근에 남자친구에 대한 불만을 ‘챗 지피티(ChatGPT)’한테 털어놓다가, ‘인간의 감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셨다고 한다. 진희 님께서는 감정을 시각화한 카드나 후각화한 방향제 같은 매체들을 통해서, 오감으로 감정을 기억하고 체험해 볼 수 있게 하는 공간을 기획해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분께서도 감정에 관한 기획 아이디어를 공유해 주셨는데, 매일 하늘 사진을 찍고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SNS로 공유하는 것이었다. 왜 하필 하늘이냐면, 천체(해, 달, 별)는 모든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백남준 선생께서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김월식 선생님께서는 사진을 찍지 말고 그냥 하늘을 매일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언해 주셨다. 사진을 찍어서 남들에게 공유하게 되면 자신보다 바깥을 더 의식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월식 선생님께서는 어떤 죄수의 사례도 들려주셨다. 그 죄수는 감옥에서 매일 무언가를 만들었는데, 거의 다 만들었을 때 즈음 교도관에게 그것을 빼앗겼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자 그 죄수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다. 징역 깼으면 됐다.”
박희언 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고 말씀해 주셨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완벽주의자인 사람들이 사실은 모자란 나 자신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 기획의 목표였다. 김월식 선생님께서는 (모두 알다시피) 남을 구원하려는 기획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모두가 그것을 의식하는 분위기였다. 희언 님께서는 사실 남을 구원하고 싶은 욕구도 자신의 완벽주의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어쩌면 희언 님의 기획이, 남보다는 스스로를 구원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희언 님의 담담한 용기가 조명처럼 반짝였다. 내면이 내면을 잡아먹으려는 치열한 반성적 성찰이 있는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언젠가, 자아의 안위를 보전하는 대신 처절하게 자신이 자신임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나의 ‘대화 이상형’이라고 블로그에 쓴 적이 있었다.
요즘도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다. 나 자신을 보호하는 것과, 나 자신과 맞서 싸우는 것. 그 사이에서 우리는 기획도 하고 예술도 하고 그냥 잠이나 실컷 자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살아온 모든 시간에 서사가 깃들어 있다.
- [1] 우리가 의미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
- [2] 병묵 님께서는 예전부터 음주에 관한 기획을 제안해 주셨다. 특히 3040 남성들을 위한.
- [3] 내가 아직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한 분이었는데, 이름표가 책상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 [4] 적어도 이소정의 엄마는 동의하실 것이 분명하다. 참, 이소정의 아빠와, 이소정의 동생도. 그리고 이소정의 유년 시절 친구들도⋯⋯.